나는 모든 것이 계획되지 않으면 다소 불안을 느끼는 유형이다. (ESFJ, 내 MBTI이다.)
예를 들면, 나는 매일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계획해 엑셀로 정리해 둔다. 또 여행을 떠날 때에는 일정뿐 아니라 어디를 어떤 루트로 가야 하는지, 근처에 어떤 ‘맛집’이 있는지 등 관광을 위한 정보를 자세히 조사한다. 물론 예약할 수 있는 것은 예약도 해 둔다.
지금이야 ‘구글 맵’에 찍고 저장하거나 메모리장을 이용하여 url을 기록하면 간단하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아내와 일주일 여행을 준비할 때이다.
아내와 둘이 앉아 LA와 샌디에이고,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였다. 대략적인 협의가 끝나고 그다음부터는 나만의 준비 시간이었다. 인터넷에서 ‘맵퀘스트’를 열고, 가기로 한 장소를 찍고, 최적의 동선을 만들었다. (구글 맵이 없던 시절, 당시에는 ‘맵퀘스트’라는 인터넷 지도가 있었다.) 그리고 동선에 적합한 숙소를 찾아서 예약하고, 보고 싶은 라스베이거스 쇼를 예매하는 것은 다음 순서였다. 이렇게 정리한 일정을 맵퀘스트로 출력하면 행선지와 행선지 사이의 루트가 상세히 나온다. 인터넷으로 바로바로 정보를 찾을 수 없던 시절, 이렇게 준비하다 보니 책 한 권 분량의 출력물이 나왔고, 그걸 제본하여 소중히 모시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여행 중 아내의 역할은 렌트카 조수석에 앉아서 지도와 프린트한 일정표의 맵퀘스트 지도를 보며 인간 네비게이터가 되어 안내를 하는 것. “할리우드 블루버드 타고 가다가, 하이랜드 애브뉴에서 우회전하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보일 거야.”
샌디에이고에서 라스베이거스로 이동하는 길에 이런 일도 있었다. 운전거리가 제법 되다 보니 중간 지점에 주유소를 찾아서 들르도록 계획을 짜 뒀었다. ‘계획대로’ 계기판에 엔고(end-go) 등이 켜질 무렵, 하이웨이 옆 마을에 있는 주유소를 찾아서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계기판의 노란 신호가 붉은 신호로 바뀐 거라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상에 있던 그 마을은 ‘고스트타운’이 되어 있었다. 마을 어귀부터 인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고, 주유소도 닫혀 있었다. 벌써 어둑어둑해진 지 오래, 시간은 오후 8시가 넘어 있었다. 사막 지역이다 보니 일찍 해가 졌다.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내가 내린 대책이란 에어컨을 끄고 남은 기름을 아끼는 정도.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을 때까지 걸린 30여 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 중 하나였다. 칠흑 같은 산길 속 휴대폰 안테나마저 뜨지 않았으니….
예전엔 그렇게 혼자서 짜던 여행 계획을, 이번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아이들과 분업했다. 팬데믹으로 3년간 미국이 어떻게 변했을지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마침 큰딸이 미국에서 석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고, 또 둘째는 어학연수 중 방학을 맞아 귀국해 있어서, 역할 분담에 안심이 되었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것, 그리고 태평양이 보이는 하프문베이 골프장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치는 티샷이었다.
와이너리, 골프, 미술관 방문 같은 큰 스케줄은 다 같이 모여서 일정을 합의한 다음, 항공권과 호텔 예약은 내가 맡고, SUV 렌트와 맛집 예약은 아이들이 맡기로 했다. 엔데믹으로 3년 만에 가족 여행을 계획하며 다들 너무 행복했다. 인터넷에서 와이너리며 하프문베이 골프장 사진을 찾아보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공항 렌터카 센터에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아이에게 차 렌트를 맡기며, 우리 짐을 실어야 하기에 SUV가 좋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그런데 아이가 테슬라 모델 S를 빌려놓은 것이다. 4명의 짐을 실을 공간은 되었지만, 아내와 나의 골프백을 넣을 공간이 부족했다. 아이는 렌트카를 찾던 중, 아빠가 늘 동경하던 테슬라가 비싸지 않은 가격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쇼’를 기대하며 약속했던 SUV가 아닌 테슬라를 예약했던 것이다. 아빠가 테슬라를 운전하며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할 그 모습에만 집중한 것이다. 아빠를 놀라게 해 주려는 아이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선의로 행한 결정이 우리 모두에게 시간 낭비와 비용 초과라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차량 교체가 안 되면 가족 중 누군가는 골프백과 함께 공항에서 기다리고 나머진 짐만 가지고 호텔에 가서 짐을 풀고 다시 공항으로 와서 그 남은 한 명과 골프백을 픽업해야만 할 상황. 다행히 렌터카 센터에 SUV 재고가 있어서 차량을 교체하긴 했지만, 1시간가량 시간이 더 걸렸고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차량 교체를 무사히 해결하고, SUV에 타고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으로 향하던 우리 가족은, 예상치 못했던 해프닝에 박장대소하며 여행을 시작했다.
가족 여행의 이 해프닝은 즐거운 추억으로라도 남는다. 하지만 조직에서의 약속 불이행은, 이런 에피소드와는 달리 어마어마한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얼마 전 시스템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이벤트가 있었다. 모든 개발자들이 모여 자신이 참여해서 개발해야 되는 항목들을 약속하고, 개발 전후의 모든 프로토콜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 개발자가 자신이 발견한 기존 시스템의 작은 결함을 추가로 수정한 일로, 서비스에 장애가 발생했다. 해당 수정으로 네트워크 프로토콜에서 예상치 못한 결함이 발생했고, 사전 협의된 개발 범위 밖이라 위험 관리도 비켜간 상황이었다. 그 개발자는 전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는 김에 단순한 결함까지 개선하여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의도로 작업을 수행했지만, 이는 다른 개발자들과의 약속을 벗어난 행동으로서, 서비스 장애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이 장애로 인해 신용카드 결제가 4시간이나 안 되어 매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약속을 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논쟁도 긍정적 효과가 있다. 하지만 약속을 했다면 ‘실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계획을 실행할 책임도 마찬가지다. 직장 생활에서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목표 관리의 근간이 된다. 그래서 약속을 완벽히 지킨다는 것은 리더십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고, 이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리더십의 원천이 된다. 진정한 리더는 예외 없이 약속을 지킨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에 대한 약속 또한 리더가 책임지고 지켜야 되는 것이다.
달성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 약속한 바를 이루는 것이 경영이다. 계획 대비 ‘초과된 실적’만이 리더의 자신감과 능력의 원천이며, 실력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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