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 찍고, 선 몇 개 그었을 뿐인데 왜 수억원에 팔릴까.`
유명한 추상화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들어도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인세인박(40)이 그 궁금증을 영상 작품 `그림을 그립시다`로 대신해준다. 아라리오 서울 전시장 2층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1980~90년대 TV 프로그램 `그림을 그립시다`로 유명했던 미국 화가 밥 로스가 등장한다. 로스는 "심플하면서도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 봅시다"고 말하면서 블루와 울트라마린을 섞은 물감을 16호 붓에 묻혀 화면 위에서 아래로 죽죽 긋는다.바로 한국 추상화 거장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패러디한 것이다.
선 긋기를 잠시 멈춘 후 로스가 긴 설명을 이어간다. "이렇게 선을 몇 개 긋고 철학적 메시지를 넣어주면 평론가나 기자들이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해석을 덧붙여서 각종 미디어에 실어줍니다. 예를 들면 이 작품 앞에 서면 경건해진다든지, 기도를 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든지·· 물론 단색화나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추상미술) 따위의 그럴싸한 타이틀도 붙여주죠.···부자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줄을 서게 될 거에요. 그저 여러분들은 선을 몇 번 그었을 뿐인데 말이죠."
영상에는 철판과 돌을 놓은 이우환의 설치작 `관계항`,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화면을 분할한 러시아 출신 추상화 거장 마크 로스코 작품, 물에 적신 한지 여러 겹을 캔버스에 붙인 후 막대기로 수만 번씩 밀어낸 단색화 거장 박서보 색채 묘법도 등장한다. 로스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며 "어때? 아주 쉽게 작품이 완성되죠"라고 강조한다.
로스의 그림 강좌를 패러디한 6분49초 짜리 밈(meme·특정 콘텐츠를 따라하고 놀이로 즐기는 현상)은 추상화에 대한 조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난 인세인박은 "추상화 거장들을 비난하는게 아니라 일반인들과 내 마음 속 질문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 것일 뿐"이라며 "추상화 기법을 따라해보고 인터뷰와 자료를 찾아보면서 인정하게 됐고 존경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다만 추상화가 비싸게 팔리는 미술 시장 구조가 존재하기에 새로운 풍자로 접근했다고 한다.
로스의 그림 강좌를 들으면서 인세인박이 직접 그린 풍경화 13점도 걸려 있다. 일명 싸구려 `이발소 그림`으로 폄하되는 풍경화들이다. 작가는 로스의 가르침 대로 그리자 하루 1점씩 쉽게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작정하면 하루 2점도 그릴 정도로 정말 쉬웠다"고 말했다. 그래도 거실 벽에 걸어놓고 싶을 정도로 색감이 좋고, 산과 호수가 잘 어우러진 풍경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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